크리스마스 무렵 유럽인들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녹이려고 마신다는 음료가 뱅쇼입니다. 이 음료는 호불호를 떠나 마셔 보면 단전 깊숙이 후끈 달아오르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프랑스 말로 포도주인 뱅(Vin)과 따뜻하다는 쇼(chaud)가 합쳐진 이름이니 따뜻한 포도주라는 뜻입니다. 비슷한 음료로 독일에는 글뤼바인(Glühwein), 스웨덴 등 북유럽은 글로그(Glogg), 영국은 뮬드 와인(Mulled wine)이 있습니다. 모두 따뜻하게 데운 포도주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포도주를 그냥 끓인 것은 아니고 설탕이나 꿀을 탄 후 오렌지, 레몬, 사과 등의 과일과 계피와 정향 등 향신료 그리고 월계수 잎이나 히비스커스 찻잎을 넣고 끓여 마십니다. 재료는 포도주지만 끓이는 과정에서 알코올 성분은 날아가기에 술이 아닌 음료입니다. 그런데도 술 마신 듯 몸이 훈훈하게 데워져 우리가 겨울에 감기 걸리면 생강차 마시듯 유럽인은 뱅쇼를 마십니다.

 

뱅쇼 이미지 1

스쿠루지 영감에게 크리스마스의 온화한 축복으로 전달된 뱅쇼

 

특히 크리스마스 무렵에 많이 찾는 음료인데요. 왜 유럽인은 크리스마스에 뱅쇼를 찾을까요? 단지 추운 계절이기 때문일까요? 뱅쇼가 대중화되고 성탄절 음료로 인기를 얻은 것은 19세기 후반입니다. 스크루지 영감으로 잘 알려진 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 덕분에 영국은 물론 유럽 곳곳에 퍼졌습니다. 개과천선한 스크루지 영감이 가난한 점원에게 월급도 올려주고 가족도 돕겠다며 따뜻한 포도주 음료 한잔 마시고 이야기하자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뱅쇼는 문자 그대로 따스함의 상징입니다. 자체가 따뜻한 음료이기도 하지만 구두쇠 스쿠루지 영감에게, 그리고 이 세상에 크리스마스의 온화한 축복으로 전달됐기 때문입니다.

 

뱅쇼 관련 이미지

중세시대 다양한 의미의 뱅쇼

그러나 근대 이전 중세 이후까지의 뱅쇼는 또 다른 성경의 음료였습니다. 즐겨 마신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뱅쇼가 어떤 음료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를 비롯한 귀족들이 연회가 끝날 무렵 소화를 돕는다는 디저트로 뱅쇼를 열심히 마셨습니다. 단순 디저트가 아니라 선물로도 인기가 높았다고 합니다.

 

16세기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뱅쇼를 사랑했습니다. 왕이 주최하는 파티에 영국식 이름인 뮬드 와인이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비슷한 시기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1세도 북유럽의 따뜻한 포도주 음료, 글로그의 애호가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면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단순히 왕의 음료, 상류층의 음료라는 대답은 진부한데요. 세 명의 왕 모두 여러 차례 결혼하고 자녀수가 많았기 때문인지 16~17세기 사람들은 뱅쇼가 정력에 좋은 음료라고 믿었습니다.

 

중세 초기 뱅쇼에 대한 인식에도 살짝 차이가 있습니다. 이때는 뱅쇼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이어서 유럽에서는 따뜻한 포도주 음료를 히포크라스(Hippocras)라고 불렀습니다.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에서 따온 이름이라는데 건강에 좋고 질병을 치료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뱅쇼 이미지 3

값비싼 재료가 쓰여 건강 음료라고 여겨진 뱅쇼

 

그러면 근대 이전 서양 사람들은 왜 뱅쇼 같은 음료가 건강에 좋고 심지어 정력 증진의 강장제라고 생각했을까요? 뱅쇼의 재료에 답이 있습니다. 와인에 넣고 끓이는 설탕과 후추, 계피, 생강과 레몬 등이 지금은 별것 아니지만, 중세 무렵에는 설탕과 후추, 레몬을 각각 화이트 골드, 블랙 골드, 황금 사과라고 불렀고 계피와 생강은 신들이 먹는 향신료로 여겼습니다. 전부 동방에서 수입해 온 값비싼 재료였기에 식품이라기보다는 약으로 쓰였기 때문입니다.

 

중세까지의 흔적을 살펴봤는데 현재의 뱅쇼는 1세기 로마 귀족이 마시던 따뜻한 향신료 포도주, 콘디움 파라독숨(condium paradoxum)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재료와 만드는 법이 중세 때 뱅쇼와 비슷한데 당시에는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 이름이 독특합니다. 역설의 음료라는 뜻인데 흔히 깜짝(surpisie) 포도주로 번역합니다. 그러고 보니 뱅쇼, 그 따뜻함에 깜짝 놀랄 만하지 않나요?

 
 

윤덕노 작가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