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빙수 화려하기 그지없습니다. 얼음도 일반 얼음이 아닌 부드럽게 사르르 녹는 눈꽃 얼음인 데다 토핑 또한 망고를 비롯한 온갖 생과일은 보통이고 심지어 눈꽃 얼음에 망고, 딸기를 얹고 그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린 후 다시 솜사탕을 덮고 다음으로 장미꽃과 금가루를 뿌린 다음 마지막으로 샴페인을 부은 금가루 빙수까지 등장했습니다. 호화로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래서 때로는 빙수가 이렇게까지 사치스러워도 되는 걸까 싶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걸 먹어도 될까 하는 경제적, 심적 부담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급 빙수에 대한 호불호와 찬반을 떠나 빙수는 조금 사치스러워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빙수 자체가 본질적으로 상류사회 인사들이 누렸던 최고의 여름철 호사 식품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스크림은 400년 전 유럽에서 귀족만이 맛볼 수 있었던 최고의 여름 디저트였습니다. 반면 빙수는 900년 전 동양 상류층이 즐겼던 천상의 여름철 별미였습니다.
요즘 빙수가 별별 좋은 토핑을 다 사용해 호화롭다지만 이것저것 조건을 따져보면 900년 전 빙수 역시 요즘 빙수와 비교해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11세기와 12세기 동양은 빙수 천국이었습니다. 그것도 단순한 얼음이 아닌 팥빙수부터 과일 빙수, 눈꽃 빙수까지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설마 옛날에 현대와 같은 빙수가 있었을까 싶지만, 역사 기록을 보면 지금 빙수와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습니다.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중국에서 정사로 인정받는 역사서 24종 중 하나, 宋史)에는 황제가 여름철 복날이 되면 궁중에서 대신들한테 특별히 밀사빙을 하사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지금의 팥빙수와 비슷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밀(蜜)은 꿀이라는 뜻이고 사(沙)는 글자 뜻 그대로는 모래지만 실제로는 팥을 간 팥소를 의미하고 빙(氷)은 얼음이니 곧 꿀과 팥으로 버무린 얼음입니다.
밀사빙이 얼음을 간 지금의 팥빙수와 비슷했을 것으로 보는 근거는 일본 문헌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1세기 일본 고전 문학인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도 빙수가 보이는데 얼음을 칼로 간 후에 쉽게 녹지 않도록 차갑게 식힌 금속그릇에 담아 그 위에 칡즙을 뿌려 먹었다고 나오는데요. 얼음 가루에 칡즙을 뿌렸으니 현대 기준으로 보면 시럽 빙수에 가깝습니다. 밀사빙 역시 얼음을 가루로 만들어 팥소로 버무렸을 것입니다.
밀사빙이나 칡 빙수 외에도 12세기를 전후한 문헌에는 별별 빙수가 다 나오는데 지금의 눈꽃 빙수로 추정되는 식품도 보입니다. 송나라 때 『몽양록』에 설포 매화주라는 음료가 있는데요. 설포(雪泡)는 눈 거품이라는 뜻이니 지금의 빙수처럼 얼음을 갈아서 눈처럼 쌓아놓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기에 매화술을 시럽처럼 부어 여름에 시원하게 마셨다는 것이니 오늘날 와인 빙수와 비슷한데요. 빙소라는 음료도 있었습니다. 소(酥)는 지금의 요구르트 내지는 치즈와 같은 유제품 종류니까 우유를 얼려 만든 빙과류이거나 아니면 사르르 녹는다는 면에서 지금 눈꽃 빙수의 원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 문헌에 다양한 빙수가 보이지만 우리 기록에는 빙수 비슷한 식품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빙수 형태는 아니지만, 우리 역시 여름철 얼음 소비는 만만치 않아 조선 시대 『성호사설』에는 여름이면 얼음을 깔아 놓은 쟁반에 신선한 과일을 올려 더위와 갈증을 달랬다니 옛날 우리 빙과문화는 지금과 달리 얼음을 직접 먹기보다는 냉장고처럼 식품을 식히는 데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고 보면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인간 중심 사상이 부활해 재창조된 것이 르네상스인 것처럼 화려했던 옛날 동양의 빙수 문화가 부활했으니 요즘이야말로 빙수 르네상스 시대입니다. 그런데 왜 현대에 다시 빙수 르네상스 시대가 시작됐을까요? 빙수가 근본적으로 풍요의 시대 슬로우 푸드(slow food)라는 사실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대는 패스트푸드에서 다시 슬로우 푸드로 옮겨가는 사회입니다. 아이스크림이 패스트푸드라면 빙수는 분명 슬로우 푸드입니다.
빙수는 즉석에서 얼음을 갈아 토핑을 직접 얹어야 합니다. 단팥에서부터 아이스크림과 인절미, 미숫가루 그리고 아몬드 호두와 같은 견과류에서 망고와 딸기 등 과일까지 입맛 따라 원하는 고명을 즉석에서 만들어 먹습니다. 얼음과 토핑을 섞어 먹어도 좋고 혼합된 맛이 싫다면 얼음 따로, 토핑 따로 순수한 맛을 즐겨도 좋습니다.
아이스크림이 패스트푸드에 기성품이라면 빙수는 슬로우 푸드에 맞춤형입니다. 현대에 빙수 시대가 부활한 배경이 아닐까 싶은데요. 시원한 빙수가 생각나는 계절에 알아본 빙수의 역사, 빙수 르네상스의 의미입니다.